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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먹기, 자기

Surviving, Eating, Resting

Gallery Hyeyum

1-6, Jangdong-ro, Dong-gu, Gwangju, Republic of Korea

                               10th October - 16th October, 2022

광주 동구 장동 62-7 갤러리 혜윰

2022. 10. 10 - 2022. 10. 16

​ 살기, 먹기, 자기  전시 포스터(Exhibition poster  Surviving, Eating, Resting),  594*841, 디지털 프린트, 2022

이 전시는 2022년 4월  20일 부터 11월 27일 까지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리고 있는  광주비엔날레 . 베니스 특별전 <꽃 핀 쪽으로>에 참여한 본인의 작업 ʻ이것이 내가 항쟁을 지지하는 방법이다(This Is How I Participate in the Uprising).’ 의 맥락을 부분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살고 죽는 것에 뚜렷한 경계가 없던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사람들을 먹이는 것에 집중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행위를 금하는 계엄소의 공문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간추려진 역사 속에 그들과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방식은 점차 상징화되어 총을 들고 싸우는 2-30대 젊은 남자 시민군을 서포트 하는 ‘어머니’와 ʻ주먹밥’ 정도로 축소되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영웅적 서사나 상징화 과정에서 축소되거나 왜곡된 사실이 있는가?이다. 목숨을 걸고 사람들 을 먹이던 주체들이 그런 행위를 할 수 있었던 자발성과 주체의식 대신 성 차별적 역할과 의미부여로 상징화되길 원치 않는다. 내가 보는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불분명하게 닥친 위태로운 상황에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몫을 다하려 했다는 것이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새겨 봄직하다. 또한 이러한 면모가 현재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나라면 어떻게 동참할 것인지 가늠해 보는 실천과 시도를 담았다. 

 

베니스 전시장에서는 코로나 상황으로 워크숍 실행이 어려워 베니스로 떠나기 전 작업의 의미와 밀박스 (Meal-box)나눔으로 대신했던 워크숍을 실행하는 것이다. ʻ주먹밥’이라는 제한적 상징성에 의문의 품으면서도 시간적, 위생 적 제약으로 더 편안한 분위기와 원하는 환경에서 이야기 나눌 수 없었던 아쉬움이 있다. 한국에서 프로젝트에 동참한 사람들 로부터 십시일반 제공받은 곡식을 가져가 현지의 생경한 재료들과 섞어 주먹밥, 찰밥, 김, 편강 등이 들어간 프로젝트 상자를 제한된 인원과 나누어 먹었다. 이 과정은 여러 면에서 나에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조금 더 우리의 삶에 가까이 당겨 함께 들여다 보는 실천이 될 것이다. 

 

가능한 만큼 친밀하게 우리가 온전히 살아남고, 건강하게 먹고, 충분히 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내 살 길, 갈 길 이 바빠 놓치고야 마는 우리의 삶을 잠시라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여럿의 삶과 밥과한 잠의 안녕과 평화를기원하며 포근한 것들을 만드는 과정이자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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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배치도(installation map)>

​<전시전경 및 디테일>
View of installation and deta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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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기  Resting

 < 잠(Sleep)>  천 방석 위에 자수, 천 가방, 워크숍 포스터, 종이 상자로 쌓은 기둥_가변설치,  2022

워크숍
Work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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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포스터 >  삶, 밥, 잠 (life, meal, sleep), 420*297mm,  2022

WORK SHOP

삶, 잠, 밥

 

평화의 은유로서의 잠:

서다솜 작가의 «살기, 먹기, 자기»에 대한 단상

 

 

정문영

 

 

안방을 나온 너는 부엌머리 네 방으로 들어갔다. 공처럼 허리를 말고 장판 바닥에 누웠다. 정신을 잃듯 잠 속으로 빨려든 뒤 몇 분 지나지 않아, 기억할 수 없는 무서운 꿈에 퍼뜩 눈을 떴다. 꿈보다 무서운 생시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채 정대의 방에선 당연히 누구의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이 켜지지 않을 것이다.

—한강, «소년이 온다»에서

 

1.

군인들이 젊은 사람이면 무조건 잡아간다더라……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더라……

공수부대 군인이 어린 처자의 가슴을 잘라냈다더라……

시절은 수상하고 온갖 기괴한 소문이 횡행하는 난리통에,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남편을, 아버지를 기다리는 가족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불면의 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불면의 밤은 한 주를 넘기지 않았지만 이 불면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져야 했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결국,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이른바 ‘광주사태’로 인해 200명을 훌쩍 넘는 민간인들이 죽거나 사라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때같은 자식을 잃었고, 어떤 사람들은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남편을 잃었으며, 어떤 이는 결혼을 앞둔 연인을 잃었습니다. 차라리 죽기라도 했으면 시신이라도 찾을 테고 그러면 산 사람은 어쨌든 삶을 이어가겠죠. 하지만 분명 살아서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고 사라진, 이른바 ‘행방불명자’를 둔 가족은 사건 이전의 삶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꿈보다 무서운 생시’를 살아내야 했을 겁니다.

 

2.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한 건 시위대의 대척점에 있던 계엄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찬가지’라는 말로 그들의 폭력을 희석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그들은 데모하는 학생들을 말 그대로 초전박살 내버리면 더 이상 데모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란 듯이 폭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5월 19일부터는 공수부대의 만행을 목격한 평범한 사람들은 시내로 몰려나와 계엄군과 대치하기 시작했고 때로는 거세게 밀어붙여 계엄군의 대열을 흩트려 놓기도 했습니다. 몰아냈는가 하면 다시 우 하고 몰려오고 이제 또 몰아냈는가 하고 뒤돌아보면 다시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며 압박하는 시민들 앞에서 계엄군 역시 먹고 자는 일조차 전투가 되었습니다. 5월 20일 밤에는 시위 진압을 위해 차출되어 함평에서 올라온 시골 경찰들이 전남도청 옆 한쪽에서 쪽잠을 자다가 돌진하는 시위대의 차량에 깔려 네 명이 숨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시위 진압에 투입된 대개의 군인들은 자신이 속한 군대에서 교육받은 대로 5.18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알았고 계엄법 하에서의 소요 진압을 국가의 정당한 공무 수행으로 이해했습니다. 자신들이 전두환 등 신군부의 군사반란과 내란 범죄에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고강도의 폭력을 드높은 자긍심으로 휘둘렀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 자긍심은, 불과 십 년도 안 되어, 의심· 불안· 고통· 무상함으로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1980대 후반을 거쳐 1990년대가 되면서 자신들이 진압했던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 되어 세간의 평가가 뒤바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982년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고자 부산 미국문화원 건물에 방화한 사건으로 유명한 문부식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5·18당시 광주 진압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원들의 아이러니한 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 당시 계엄군이 살아내야 했던 운명의 일단을 엿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동작동 국립묘지 동30· 동31 묘역에는 20여 구의 공수부대원들의 시신이 묻혀 있다. 그들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죽은 병사들이다. 한때 국난을 이겨낸 영웅들로 명명되었던 그들은 광주가 진압된 직후 자신들의 희생을 기리는 군악대의 장엄한 조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그곳에 묻혔을 것이다. 그때 그들의 신상 카드에는 “80년 5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폭도들에 의하여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곳엔 그들의 가족은 물론이고 그때 그들과 함께 광주에 있었던 공수부대 예비역 병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갔다. 어느 해부터인가 거기엔 그들의 동지들이 달아 놓았던 검은 리본만이 손가락을 대면 부스러질 정도로 퇴색된 채 겨우 비석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몇 해 전 내가 어느 잡지에서 읽은 기사의 내용을 떠올려 본 것이다. 그 기사의 제목은 「아무도 광주를 말하지 않는다」였다. 광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귀와 입을 막고 그것을 자신의 기억 속에서 지우려 안간힘을 쓴 사람들이 있었다. 전두환·노태우 이야기가 아니라,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 특전사 병사들 이야기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추적해 가는 그 기획의 다른 기사에는, 제대 후 대인기피 증세에 시달리다 어느 해인가 정신착란 상태에서 형수를 죽이고 중학생 조카에게 흉기를 휘둘러 다치게 한 특전사 출신 어느 병사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1989년 광주청문회가 열릴 때 그는 꼼짝도 안 하고 텔레비전을 지켜보며 며칠씩이나 방구석에 처박혀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기사가 쓰인 1994년 5월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법무부 치료감호소에 있었다.

그 후 나는 그 기사를 잊고 있었다. 우리가 무심코 격동의 시대라 부르는 1980년대를 나와는 다른 위치에서 살아낸 사람들에 대한 나의 관심은 또 한 번 역사의 가파른 흐름 속에 묻히게 되었다.

 

3.

저는 지금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위원회에서 5·18 당시에 숨진 166명의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다시 들여다보고 정리하는 작업을 3년째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과업은 하루이틀 전에 일어난 사망사건도 아닌, 무려 40여 년 전에 사망한 사람들의 사망 경위를 전수 조사하라는 참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전수’라는 말에도 함정이 있는데, 과업에 착수할 때까지도 그 ‘전수’는 주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66명이라는 숫자를 찾아내는 작업조차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직 남아있는 썩은 시신들의 단편을 모아 퍼즐을 맞추는 작업을 하는 동안 저 역시 일년 넘게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의식의 수준에서는 멀쩡해도 무의식의 수준에서는 의심과 불안, 고통, 삶과 죽음의 무상함에 침윤되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다시 회복될 일상을 꿈꿉니다. 그 일상은 물론 내 눈 앞에 시체들이 사라진 일상이겠지요.

사실 저는 166명의 사망자들의 삶과 죽음을 들여다보면서 이들 중 절대 다수는 영웅적인 투쟁가였던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와 함께 일상을 나누었던 필부필부들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영웅적인 어떤 이가 없진 않았지만 그들조차 죽음을 예감하며 지키고자 했던 것은 퇴색한 전남도청 건물도 아니고 또 민주주의와 같은 어떤 거창한 이념도 아닌, 자신들이 그간의 투쟁 속에서 느꼈던 동료와의 우정,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보여주었던 따듯한 말 한마디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따듯한 기억이란 그저 목 마른 시위대 청년에게 물 한 사발 건네고 땟국물 흐르는 어린 시민군에게 그저 내 자식 같아 배곯지 말라고 주먹밥 한 덩이 건네는 아주머니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장차 이 난리통이 지나가면 다시 되돌아가게 될 어머니, 아버지, 형, 동생이 밥상머리에 얼크러져 있는 일상의 삶의 기대였던 듯합니다.

서다솜 작가의 전시 «살기, 먹기, 자기»는 우리 현대사에서 대단히 특별한 의미로 추존하는

5·18을,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듯 죽음을 불사한 영웅적인 투쟁을 추앙함으로써가 아니라 먹고 자는 저 낮은 일상의 생존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조용히 보듬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작가의 이 반복의 행위가 단순한 반복이 아니게 느껴지는 것은 그저 먹고 자는 것으로 축소된 ‘생존’의 모방이 아니라 맛있게 먹고 행복하게 잠들며 사는 온전한 삶의 모방인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걸 거창하게 얘기하면 나와 내 이웃의 안녕과 평화에 대한 기원이겠지요. 그래서 오늘 서다솜 작가의 전시에 오신 분들과 그리고 죽은 자들과 산 자들 모두에게 이렇게 인사하고 싶어집니다.

 

다들 안녕하십니까.

2.  도네이션  | Donnation ​Practice

​<도네이션 현장 비디오 (video: donation sketch)> 0:3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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